삼권분립과 오권분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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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권분립(三權分立)은 민주주의의 기본 형태이다. 행정, 사법, 입법의 삼권이 각자 독립되어 자기 기능을 발휘하는 형태이다. 그런데 근년에 들어 삼권분립을 넘어 오권분립(五權分立)을 말한다.
선진국, 선진사회로 갈수록 오권분립이 더욱 확실하여 진다. 아니 오권분립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서는 선진국 혹은 선진사회가 이루어질 수 없다는 지적이다. 오권분립이란 삼권분립의 행정, 사법, 입법에 언론과 시민운동을 더하여 오권분립이라 일컫는다.
유럽이나 미국같은 선진국가, 선진사회들에서는 오권분립이 이미 피할 수 없는 상식으로 되고 있다. 그런데 한 국가나 한 사회에서 오권분립이 제대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기존의 행정,사법,입법기관들이
제구실하는 위에 언론이 제구실을 하여야 하고 시민단체들이 성숙된 모습으로 제구실을 하여야 한다. 언론이나 시민운동기관들이 제구실을 한다는 것은 법치주의의 기틀 위에 준법성, 독립성, 공익성 등이 확보 되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우리 사회는 아직 오권분립이 제대로 이루어지기에는 상당히 거리가 있음을 느낀다. 언론 측에도 물론 문제가 많이 있긴하지만 언론보다 더 문제인 것은 시민운동, NGO 분야이다. 이점은 나 자신이 지난 3년여 동안 시민운동 분야에서 활동하여 오면서 실감나게 느낀 점이다. 우리 사회에도 시민운동 분야가 활발하였던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진작에 있었던 시민운동 기관인 YMCA, YWCA에 이어 경실련 , 참여연대, 환경연합 등의 운동단체들이 활약하여 왔고 최근에는 내가 몸담고 있는 뉴라이트운동이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단체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한결같이 정치계로 나가는 수단으로 시민운동에 참여하고 있다.
이점에서는 지난 정권에 경실련이나 참여연대 출신들이 대거 정부기관에 발탁되어 참여케 됨으로서 두드러졌다. 그래서 순수 시민운동으로 나가지를 못하고 시민운동을 정부기관이나 국회로 나가는 발판으로 삼음으로 시민운동을 변질시켰다.
그래서 나는 뉴라이트운동에 대하여도 심한 갈등을 느낀다. 이번에 정권교체가 이루어지게 되면서 뉴라이트에 몸담았던 동지들이 너무나 많이 국회의원 공천에 신경 쓰는 모습을 보고 갈등과 회의를 느끼는 것이다. 시민운동은 그 자체로서 의미와 권위를 지니는 것이다.
시민운동에 참여하는 인사들이 제5부에 중심인물로 역할을 하겠다는 긍지와 헌신 그리고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진정한 오권분립이 이루어지게 된다. 그리고 시민운동에 헌신하는 동지들이 행정부, 사법부, 입법부 그리고 언론계와 맞먹는 긍지를 지니고 시민운동에 참여할 때에 보람을 거두게 되고 또 국가와 사회에 유익을 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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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력과 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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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시인이 이르기를 “시인은 손바닥에 한 알의 씨앗을 놓고 새 소리를 듣는다”고 하였다. 시인은 남다른 상상력을 통하여 씨앗 한 알을 놓고 그 씨앗이 자라 큰 나무가 되고 그 나무에 깃들인 새들의 소리를 듣는다는 것이다. 이런 상상력이 얼핏 보기에는 한갖된 공상같이 여겨질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이런류의 상상력이 인간사에 몹시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한 개인이나, 공동체, 사회나 국가에 이런 상상력이 있고 없음에 따라 그 분위기가 완연히 달라진다.
나폴레옹 장군이 남긴 말 중에 “인류의 미래는 인간의 상상력과 비전에 달려 있다”는 말이 있다. 옳은 말이다. 상상력이 있고 비전이 있는 개인이나 집단은 미래가 열리고, 상상력이 메마르고 비전이 없는 개인이나 집단은 미래가 닫히게 된다.
독재국가나 전체주의 국가가 인간에게 해로운 것은 상상력의 세계를 닫아버리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이르시기를 하나님의 나라는 한 알의 겨자씨와 같다고 하였다. 그 겨자씨가 처음엔 씨 중에 작은 씨이지만 나중에 자란 후에는 큰 나무를 이루고 숲을 이루어 숱한 새들이 깃들이게 된다.
씨앗은 작지만 생명이 깃들어 있다. 생명이 있다는 말은 미래가 있다는 말이요 희망이 있다는 말이다. 그러기에 예수께서는 하나님 나라를 설명하시면서 비록 작게 시작하지만 생명이 자라고 자라 마침내는 온 땅에 차고 넘치게 되는 미래의 나라로 설명하셨다.
그러기에 하나님 나라의 일꾼된 사람들은 생명의 씨앗을 품고 미래를 향한 희망을 기르며 나아가는 상상력을 지녀야 하고 비전을 품어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 나라의 일꾼된 사람들에게 주어진 사명이자 축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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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 같이 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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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자 에릭 번(Eric Berne)은 인간의 성격을 세 가지 기능으로 나누었다. 어버이 기능, 어른 기능, 어린이 기능 세 가지이다.
‘어버이 기능’은 자신보다 약한 사람들을 가르치고 보살펴 주는 기능이다. 양육적이고 권위적인 기능이다.
‘어른 기능’은 현실을 이해하고 현실에 잘 적응하며 대처하여 나가는 기능이다. 어린이 기능은 인간이 인간다운 맛이 나게 하는 기능으로 인간에게 생동감을 주고 순수함을 주는 기능이다. 이 기능에는 웃고 울고 기뻐하고 슬퍼하며 인간다움을 지니게 하는 역할이 포함된다.
그런데 정신병 중에 ‘어린이 상실증’이란 병이 있다. 소위 신앙이 좋다는 사람들이 많이 걸리는 증상이다. 울고 싶을 때에 울지를 못하고 웃고 싶을 때에 웃지를 못한다. 그리고 놀고 싶을 때에 놀지를 못하다가 어느 날 미쳐 버리는 병이다.
인간의 마음속에 어린이 기능이 매말라 인간성을 잃어버린 병이다. 요즈음 사람들의 정신세계가 너무나 삭막해지는 이유가 어린이 기능을 잃어버린 탓이다. 그래서 우리들 주위에는 어린이 상실증의 초기 증세에 걸려 있는 사람들이 예상 외로 많다.
내가 최근에 경험하는 바로는 한국의 정치계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 중에 이런 증상의 초기에 접어들고 있는 사람들이 숱하다. 참으로 염려스러운 바이다. 이런 증상에 부채질을 하는 역할을 우리사회의 매스컴들이 한 몫을 담당하고 있다.
텔레비전이나 신문이 너무나 물고 뜯고 험담하고 배척하는 기사들로 채워지고 있기에 그 텔레비전을 보고 신문을 읽는 사람들이 짜증스러워지고 사나워지게 되면서 어린이 기능을 점차 잃어가게 된다. 잃어가고 있는 어린이 기능을 회복하는 일이야말로 지금 이 나라가 신경써야 할 가장 중요한 일들 중의 하나이다. 정치도 교육도 종교도 이 역할을 감당함에 총동원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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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한 어린 아이를 불러 저희 가운데 세우시고 가라사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태복음 18장 2절,3절)
심리학자 에릭 번이 사람의 기능을 분류하기를 어버이 기능, 어른 기능, 어린이 기능으로 구분하였음을 어제 소개하였다. 그리고 우리 사회에서 어린이 상실증이란 정신병에 걸린 사람들이 적지 않음도 이미 언급한 바이다. 예수님 당시에 스스로 잘 믿는다고 자부하였던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 중에 어린이 기능을 잃은 사람들이 많았다. 예수님께서 이르시기를 그런 사람들은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사람들이라고 하셨다.
천국은 어린이 기능이 왕성하여 어린 아이들의 마음가짐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몫이라고 하셨다. 어린 아이들은 순수한 마음으로 순리대로 행동한다. 마치 흐르는 물과도 같다.
그러나 어른들은 다르다. 자신의 욕망과 자신의 집착에 따라 행동한다. 좋은 크리스천이 된다는 것은 어린 아이 같은 마음을 지닌 사람이 되는 것이다. 성공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다. 사람다운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유명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유익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불행하게도 우리 사회는 어린이 기능이 너무나 줄어들고 있다. 곳곳에 술수와 거짓, 과장과 배척이 넘쳐나고 있다. 이런 현실을 고쳐나가는 일에 정치가들로써는 역부족이다. 종교가 가장 크게 역할을 하여야 할 부분이다. 그러므로 교회가 교회다워진다는 것은 순수하여지고 투명하여져 어린 아이 같은 모습을 회복하는 길이다 그래야 병든 세상을 구원하는 사명을 감당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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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의 영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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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들은 다른 국민들에 비하여 영성이 두드러지게 깊은 국민들이다. 그래서 종교가 왕성하다. 한 예로 같은 모습을 한 동양 3국인(중국인, 일본인, 한국인)들이 해외에 나가면 중국인들은 가는 곳마다 중국요리 식당을 연다. 일본인들은 상사를 연다. 그런데 한국인들은 교회를 세운다. 한국인들이 해외에 세운 교회들이 이미 4500교회를 넘어서고 있다.
그런데 한국인들의 이러한 왕성한 종교성이 바른 길을 찾아 개인과 사회에 유익을 주는 바른 영성을 갖추어야지 그렇지를 못하고 삐뚤어지거나 그릇된 영성을 지녀서는 그 신앙을 지닌 개인에게도 사회 전체에도 유익을 주지 못한다.
이점이 지금의 한국교회에 특히 중요하다. 근래에 한국교회는 매스컴으로부터 여러가지로 비판과 비난을 받고 있고 세인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당하고 있다. 물론 그 내용을 살펴보면 실제 내용에서 과장되거나 왜곡된 내용이 많다. 그러나 최소한도로 그런 비판과 비난을 받게 되는 원인을 교회들이 제공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리고 신앙심을 얻으려고 교회에 다니다가 이런저런 사정으로 인하여 교회에 환멸을 느끼고 교회를 떠나 성당으로 옮기거나 심지어 불교로 옮겨가고 있는 분들 역시 적지 않다. 내가 아는 한 신부님의 말에 의하면 성당의 신도가 최근들어 급증하고 있는데 새롭게 등록하고 있는 신도들 중에 상당수가 교회에서 옮겨오는 분들이라 하였다.
연세대학 신과대학에서 그렇게 교회를 떠나 성당이나 사찰로 옮겨간 분들을 만나 그 이유를 인터뷰하고 분석한 내용을 발표한 바 있다. 그 발표의 내용에 의하면 그 이유들 중에 가장 큰 이유 3 가지가 있다. 첫 번째가 “교회는 너무 시끄럽다”는 지적이었다.
교회는 너무 시끄럽다는 지적은 짐작컨대 2 가지 내용일 것 같다. 첫째는 교회는 분열이 심하다거나 목회자들의 스캔들이나 비본질적인 잡음이 너무 잦다는 점일 것이다. 두 번째는 교회의 예배 분위기나 흐름이 깊이의 차원이 결여된 체로 너무 들뜨고 소란하다는 점일 것이다.
-좋은 글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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