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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서울의 지명 배경
서울 서초구 양재동은 조선조 때 양재도찰방(良才道察訪)이 있었던 곳으로 종6품 찰방이 있어 그 밑에 12개의 작은 역을 두고 관원에게 말과 숙소를 제공했던 곳이다.
양재역을 말죽거리라고도 하였는데 1624년 이괄이 반란을 일으켜 도성을 침범하자 인조는 황황히 한양을 빠져 나와 충청도 공주로 피난케 되었다.
도성을 벗어난 임금 일행이 이곳에 이르러서는 허기와 갈증에 지쳐 있었다. 그러자 이곳에 사는 유생들이 급히 팥죽을 쑤어 바치니 임금은 말에서 내릴 틈도 없이 말 위에서 죽을 먹고 부랴부랴 떠났다 해서 말죽거리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또 하나 이야기는 한양 도성에서 이곳까지는 한나절 거리로 지방에서 한양에 도달하려면 이곳에서 마지막으로 말의 먹이인 말죽을 먹이는 곳이라 해서 붙여졌다고도 한다.
어질고 재주 있는 선비들이 많이 산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양재동은 조선 명종 때 벽서사건으로 유명한 곳이다. 인종이 갑자기 죽고 어린 명종이 즉위하자 그 모친인 문정왕후 윤씨가 수렴청정하여 정권을 잡아 나라를 다스렸다. 그래서 이로 인한 폐단도 많았는데 이곳 양재역 벽에 붉은 글씨로 "여자가 임금 위에 있고 간신이 그 아래서 국권을 농락하니 어찌 한심치 아니하랴!"라는 글이 붙어 있었다. 이 사실을 전해들은 문정왕후는 대노하여 여러 선비를 잡아죽이고 당대의 명현 수십 명을 귀양 보내는 등 이른바 정미사화를 일으켰다. 이것을 역사는 `양재역 벽서사옥`이라고 하였다.
서울 용산구 이태원은 서울 속의 외국인 거리다. 점포마다 걸려있는 간판은 모두 외래어이고 오고 가는 행인도 내국인보다는 외국인이 더 많다. 한강과 가까운 이곳은 군사적 요충지로 부대가 주둔하기에 적합한 장소인가 보다.
최근까지 미군이 주둔하고 있지만 임진왜란 때는 왜적이 주둔하였다. 당시 이곳에는 여승인 비구니들이 수도하는 운종사(雲鍾寺)라는 절이 있었는데 왜적이 주둔하면서 여승들을 겁탈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왜군이 물러나자 조정은 왜군에게 겁탈 당해 낳은 아이들 문제로 고심하였다. 그래서 운종사 여승을 포함하여 왜적의 아이를 낳은 부녀자들을 벌하지 않기로 하고 이곳에 보육원을 지어 그 아이들을 기르게 하였으니 이때부터 이곳을 이태원(異胎院)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또 임진왜란 때 항복한 왜군들이 조선에 귀화하여 이곳에 모여 살았으므로 이타인(異他人)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지금의 이태원(梨泰院)으로 쓰인 것은 효종 때 이곳에 배나무를 많이 심어 재배했기 때문에 바뀌게 되었다.
--참고자료 : 600년 서울 땅이름 이야기, 김기빈 지음, 살림터--
조선 개국 초기 무학대사가 도읍을 정하려고 지금의 왕십리 부근에서 지형을 살피고 있었다. 그런데 한 늙은이가 소를 타고 지나가다가 채찍으로 소를 때리면서 "이 소가 미련하기는 꼭 무학과 같구나. 바른 곳을 놔두고 엉뚱한 곳을 보다니..." 하는 게 아닌가. 깜짝 놀란 무학이 그 노인에게 예를 갖추고 도읍지의 자리를 물었더니 채찍으로 서북쪽을 가리키며 십리를 더 가라고 하였다. 그 말에 따라서 지금의 경복궁 자리를 정하였는데 왕십리라는 이름이 여기서 비롯되었다. 그 늙은이는 도선이 현신한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가 한양으로 천도한 다음 새로운 궁궐(경복궁)을 짓고 도성을 쌓으려 할 때 어디서 어디까지 쌓아야 할지 난감했다. 어는 날 큰 눈이 내려 살펴보니 눈이 하나의 선을 따라 선 밖에는 눈이 쌓여 있고, 선 안쪽에는 눈이 없었다. 이 태조는 이러한 현상은 우연이 아니고 필시 하늘에서 내린 뜻이라 생각하고 그 선을 따라 도성을 쌓도록 하였다.
도성은 산의 능선을 따라 북악산, 인왕산, 남산, 동대문에 있는 낙산을 연결하는 것으로 둘레가 40리(약17Km)에 이른다.
사람들은 눈이 한양의 울타리를 만들었다고 하여 도성을 눈설(雪)자를 써서 `설(雪)울`이라고 불렀고 설울이 서울로 발음되면서 오늘날 서울이 유래 된 것이다.
서울 송파구에는 마천동(馬天洞)과 오금동(梧琴洞)이 있으며, 부근에는 마산(馬山), 투구봉 등이 있다.
병자호란 때 청나라 군사가 쳐들어오자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난하게 되었다.
임금 일행이 이곳을 황급히 지나다가 백토고개에 이르러 잠시 쉬어가게 되었는데 궁궐에서만 생활하던 임금인지라 갑자기 먼길을 달리다 보니 오금이 아파 "아이구 내 오금이야."하고 한탄했다. 하여 이곳을 오금골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이곳에 있는 마산(천마산)에서 비롯된 이름으로 병자호란 때 임경업 장군이 오금동 개롱리에서 농을 열어 갑옷을 입고 천마산에서 나온 용마를 타고 거여동에 있는 투구봉에서 투구를 쓰고 출전하였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개롱리에는 임경업 장군의 증조부 무덤이 있는데 매화낙지형(梅花落地形)의 명당이라고 한다. 전설에 의하면 장군의 증조부가 암룡이 변신한 여자의 도움을 받아 이 자리에 들어간 탓으로 후손 중에 임경업 장군이 태어났다고 한다.
서울 도봉구에 번동은 본래 벌리(伐李)라 부르던 곳이라 한다. 이 이름은 고려 말엽 한양에 오얏나무가 무성하므로 이씨(李氏)가 일어날 징조라는 참언이 유행하자 이곳에 벌리사(伐李司)를 두어 이를 베어 내게 하였으므로 벌리라고 불렀다가 뒤에 번동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종로구 효제동에 예이동 또는 종이촌(種李村)이라는 옛 땅이름이 있다. 종이촌이라고도 하였는데 이씨가 고려를 뒤엎고 한양에 도읍을 정할 것이라는 참설이 나돌자 고려 조정에서 이것을 막기 위해 한양 동쪽에 오얏나무를 많이 심었다가 무성하게 자라면 베어버렸다.
그리고 지명도 오얏나무를 밴다는 뜻으로 예이동(刈李洞)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한양을 도읍지로 정하자 이곳이 이씨왕조를 세운 곳이라는 뜻에서 종이촌(種李村)이라 하였다 한다.
서울 사당동에서 과천으로 넘어가는 곳에 있는 남태령은 옛 문헌에 호현(狐峴, 여우고개) 또는 엽시현(葉屍峴)이라 하였다. 옛날 길손이 줄지어 넘나들던 산길의의 본래 이름이 여우고개였다. 조선시대에 효성이 지극했던 정조는 부친 사도세자가 불우하게 일생을 마친 것을 슬퍼하여 수원에 있는 능에 수시로 참배를 다녔다.
정조가 수원으로 가는 길은 두 갈래가 있는데 한 길은 동작나루를 건너 이 고개를 넘어 과천을 지나 수원으로 향하는 길이었고, 다른 한 길은 노량진에서 시흥 안양을 지나 수원으로 이르는 길이었다. 정조는 처음 한 동안은 과천을 거치는 길을 택했으나 사도세자를 죽게 했던 영의정 김상로가 과천 태생으로 그의 무덤을 거치는 것을 불쾌하게 생각하였다. 그래서 나중에는 시흥 안양을 거치는 길로 노정을 바꾸었다. 어느 때인가 정조가 과천 길을 택하여 수원으로 향하다가 이 고개에서 쉬어 가던 중 시종들에게 고개 이름을 물었다. 이때 과천현 이방이 남태령이라고 대답하자 본래 이 고개 이름이 여우고개인 줄 알고 있었던 정조는 거짓말을 한 이방을 나무라고 그 이유를 물었다. 이에 이방이 "본래 여우고개라 하지만 임금께 요망스러운 이름을 댈 수가 없어 꾸며댄 이름으로, 도성에서 남쪽으로 가다가 첫 번째 큰 고개이므로 남태령(南泰嶺)이라 한 것이옵니다."하고 아뢰었다.
정조는 이를 가상히 여겨 그때부터 여우고개를 남태령으로 고쳐 부르도록 했다고 한다.
서울 마포구 창전동에 와우산(臥牛山)이 있다. 옛날에는 와우산에서 부는 목동의 피리 소리와 농바위 부근의 저녁 짓는 연기 모습이 매우 아름다워 서호팔경(西湖八景)으로 꼽혔던 곳이다.
와우산은 서강 쪽에서 바라보면 마치 소가 누워있는 모습과 같다하여 이름 지어진 것이다.
1970년 소의 등허리 부분에 와우아파트가 들어섰다. 무거운 짐을 지게 된 소가 몸을 흔들자 아파트가 와르르 무너져 33명의 사망자와 40여명의 부상자를 냈다. 아직도 부실공사의 대명사로 되고 있는 와우아파트 붕괴사건은 지명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와우는 집이 무너진다는 뜻도 된다. 한국전쟁 때 국군과 인민군 사이의 전투에서 2000명의 사상자를 낸 격전지였다니 산을 다치게 하면 결국 사람이 다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일이다.
♬ 향수(정지용곡)-색스폰연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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