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莊子)내편(內篇)제1권
소요유(逍遙遊)에 나오는 혜자의 가죽나무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혜자가 장자에게 말했다.
“나 있는 곳에 큰 가죽나무가 있는데,
사람들은 그것을 아무 짝에도 쓸 데가 없다 해서
‘개똥나무’라고 부르오. 그 줄기는 혹이 많아 먹줄을 칠 수가 없고,
그 작은 가지들은 뒤틀려 있어서 자를 댈 수가 없소.
지금 당신의 말도 크기만 했지 쓸 곳은 없으니,
모든 사람들이 상대도 안 할 거요.”
장자가 말했다.
“당신은 홀로 있는 고양이를 보지 못했나요?
몸을 낮추고 엎드려서 튀어나올 먹이를 노리지만,
높고 낮음에 거리낌이 없이 이리저리 뛰어다니다가
덫에 걸리고 말거나 그물에 걸려 죽고 말지요.
소는 그 크기가 하늘에 드리운 구름과 같소.
이놈은 큰일은 할 수 있지만 쥐는 잡지 못하오.
지금 당신은 큰 나무를 가지고, 그것이 쓸 데 없다고 근심하고 있소.
어째서 아무 것도 없는 고장의 광막한 들에다 그것을 심어 놓고,
하는 일 없이 그 곁을 왔다 갔다 하거나 그 아래 노닐다 드러누워 낮잠을 자지 않소?
그 나무는 도끼에 일찍 찍히지 않을 것이고, 아무도 그것을 해치지 않을 것이오.
쓸 데가 없다고 하여 어찌 마음의 괴로움이 된단 말이오?”
*큰 그늘을 드리우는 큰 나무
우주 만물은 평등하다. 자연의 질서는 조화 가운데 정연하다.
조물주는 모든 사물에 제 나름대로의 ‘개성’이란 그릇을 마련해 주었다.
그 그릇을 채우는 것이 사물들의 임무다.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큰 그릇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
작은 그릇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 천차만별이다.
큰 그릇을 가지고 태어났다고 다 좋은 것은 아니다.
그 사람은 평생 그 그릇을 채우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작은 그릇을 가지고 태어났다고 해서 실망할 필요도 없다.
작은 그릇은 이 세상에서 작은 그릇대로의 써먹을 데가 있기 때문이다.
부자라고 다 행복한 것은 아니다.
그가 그릇이 크다고 해서 자랑만 하고 제 그릇을 다 채우지 못한다면,
지하도 밑의 걸인이 작은 그릇을 다 채우는 것만도 못한 인생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장자는 반복법의 명수다. 그 반복법의 공통점 속에 장자 철학의 열쇠가 들어 있다.
장자의 이야기 중 공통점은 다음과 같다. ‘소’와 ‘나무’는 큰 것이다.
‘고양이’와 ‘쥐’는 작은 것이다. 소는 고양이와 쥐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지 못한다.
무거운 짐을 실어 나르고 밭을 갈 뿐이다.
고양이나 쥐 역시 그들이 할 수 있는 작은 일밖에 못한다. 큰 나무는 소와 같다.
큰 나무의 할 일은 그래서, 목재나 땔감으로 쓰이는 작은 나무들과는 달리,
큰 그늘을 드리워 사람들에게 쉼터를 제공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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