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시인은 유난히 눈물이 많은 사람이다.
이른 봄 양지바른 비탈에 피어 있는 연분홍 진달래만 보아도 눈물을 흘리고,
초여름 먼 산에서 우는 뻐꾸기 소리만 들어도 눈물을 흘린다.
시인은 아무런 탐욕이 없다.
아무리 아끼는 물건이라도 탐내는 사람이 있으면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주어버리면서도,
정작 한번도 남의 물건을 탐낸 적은없다.
시인은 시가 세상을 썩지 않게 만드는 최상의 방부제라고 생각한다.
마음이 부패하면 시도 부패하고, 시가 부패하면 세상도 부패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아무나 농사를 지울 수는 있어도 아무나 농사꾼은 될 수 없으며,
아무나 시를 쓸 수는 있어도 아무나 시인이 될 수는 없다.
피땀을 흘리지 않는 농사꾼이 풍성한 수확을 기대할 수 없듯이
고통을 감내하지 않은 시인이 아름다운 시를 기대할 수는 없다.
시는 무통분만이 불가능한 예술이기 때문이다.
증류수처럼 투명한 영혼을 간직한 채 살아가는
이 시대의 마지막 서정시인은 당연히 낭만과 예술이
매몰되어 가는 현실을 남보다 몇 배나 고통스러워하면서 살아갈 수 밖에 없다.
시인이 자유를 노래하는 것이
도대체 어느 하늘 아래에서 죄가 되는가
나는 자유롭게 살고 싶었다. 나는 인간답게 살고 싶었다.
그러나 단 한 번도 자의에 의한 삶을 살아갈 수가 없었다.
나는 언제나 외톨이었다.
사람들은 어느 사이에 돈이나 기계나 제도 따위와 한패가 되어
나와는 전혀 다른 시간들을 경영하면서 살아가고 있었다.
사랑하는 빈센트 반 고흐, 나도 한쪽 귀라도 자르고 싶었다.
시인은 쇠그물이 쳐져 있는 봄의 창살 밑에서
날마다 온정신을 집중시켜
원고지 속에다 자유라는 이름의 씨앗들을 심어넣는다.
시인의 아픔을 이해할 수 있는 대통령은
만백성의 아픔도 이해할 수가 있다.
시인은 결코 닭이 아니다.
날만 새면 습관적으로 울음을 울어서 다른 사람의 잠을 깨워주어야 하고
둥지에 들어앉기만 하면 의무적으로 하루 한 알씩 계란을 낳아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몰상식한 인간들의 편견에 지나지 않는다.
시(詩)는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이 시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어. 너무 어려운 시야.'
그러나 어려운 것은 시가 아니라 그렇게 말하는 사람의 시에 대한 편견이다.
도대체 시를 이해하려고 든다는 것부터가 무모하다.
시가 감상되는 것이라는 기초적 상식을 버리고서는 도저히 시에 근접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 세상이 왜 이토록 험악하게 변했는지 아는가
시를 사랑하는 마음들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하늘을 향해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는 시인의 가슴을 모두가 느낄수만 있다면,
이 세상에 최소한 전쟁이나 증오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의 가슴 안에는 절대적으로 시가 필요하다.
시를 읽고 눈시울을 적실 수 있는 감성이 필요하다.
그러나 시라는 것이 어디에서 생겨나는 것이랴.
들리는 모든 것이, 보이는 모든 것이,그리운 모든 것이, 사랑하는 모든 것이,
시가 되고 눈물이 되는 것이 아니랴.
애증이 없이 어찌 인간으로 남아 있을 것이며
이론과 실제만으로 어찌 인간끼리 살아갈 수가 있을 것인가.
그대는 모른다.
시가 얼마나 지독하게 짙은 아편인가를....
아편꽃을 씹으면서 우리가 끌어안는 외로움이 얼마나 저린 뼈와 형벌인가를.....
모래알이라는 이름의 작은 지구 속에는 어떤 마음을 가진 시인들이 살고 있을까.
그리고 시인이여
시인이여!
당신은 철저하게 고독해야만 시를 쓸 수가 있다.
될 수 있는 한 자학하면서 살아야 한다.
그러나 굶거나 몸에 상처를 입히지는 말라.
부디 시 속에서만, 시 속에서만 울어야 한다.
한 줄을 건지기 위해 한 달을 잠 못 들었다면,
한 편을 버리기 위해서는 또 얼마나 잠 못 들어야 하는 것인지....
그 어떤 행동이 보여주는 위력 보다도 단 한 줄의 시가 보여주는 위력이
얼마나 진실하고 위대한 가치를 지니는가!
인간이 시를 모른다는 사실은 곧 죄악이다.
문학과 가정 중에서 어는 것이 더욱 소중한가
나는 어느 것이 더욱 소중하다고 잘라 말할 수가 없다.
둘 다 소중하지만 그 색채가 다르다고 생각한다.
문학은 개인적인 이유에서 소중한 것이고
가정은 타인에 대한 애정이 담겨 있기 때문에 소중하다.
하늘빛 그리움
살아간다는 것은
저물어 간다는 것이다.
슬프게도 사랑은 자주 흔들린다.
어떤 인연은 노래가 되고
어떤 인연은 상처가 된다.
하루에 한번씩 바다는 저물고
노래도 상처도
무채색으로 흐리게 지워진다.
나는
시린 무릎을 감싸안으며
나즈막히 그대 이름 부른다.
살아간다는 것은
오늘도 내가 혼자임을 아는 것이다.
길은 돌아오기 위해 존재한다
길은 떠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돌아오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다.
길을 만들기 이전에는 모든 공간이 길 이었다.
인간은 길을 만들고 자신이 만든 길에 길들여져 있다.
그래서 이제는
자신들이 만든 길이 아니면 길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나의 인간은 하나의 길이다. 하나의 사물도 하나의 길이다.
선사들은 묻는다
어디로 가십니까 어디서 오십니까
그러나 대답할 수 있는 자들은 흔치 않다.
때로 인간은 자신이 실종되어 있다는 사실조차도 모르고 길을 간다.
인간은 대개 길을 가면서 동반자가 있기를 소망한다.
어떤 인간은 동반자의 짐을 자신이 짊어져야만 발걸믐이 가벼워지고
어떤 인간은 자신의 짐을 동반자가 짊어져야만 발걸음이 가벼워진다.
길을 가는데 가장 불편한 장애물은 자기자신이라는 장애물이다.
험난한 길을 선택한 인간은
길을 가면서 자신의 욕망을 버리는 일에 즐거움을 느끼고
평탄한 길을 선택한 인간은
길을 가면서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일에 즐거움을 느낀다.
전자는 갈수록 마음이 너그러워지고
후자는 갈수록 마음이 옹졸해진다.
지혜로운 자의 길은 마음 안에 있고
어리석은 자의 길은 마음 밖에 있다.
아무리 길이 많아도 종착지는 하나다.
* 이외수(李外秀)는 1946년생 경남 함양군 출신으로 소설가이자 시인 이다.
1972년 단편소설 『견습 어린이들』로 데뷔했으며, 1973년 중편소설 훈장이 세대지에서
신인문학상을 받으면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춘천에서 30여년 거주하다 2006년 이후 현재
강원도 화천군 다목리 감성마을에 거주하고 있다. 2000년 문학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이사장을 지냈고, 2008년 제3회 A-어워즈 이노베이션부문상을수상했다. 주요작품으로는
소설 『훈장』,『꿈꾸는 식물』,『겨울나기』,『장수하늘소』,『들개』,『칼,『산목(상),
『벽오금학도』,『황금비늘』, 『괴물』, 『장외인간』 과 시집으로 『풀꽃 술잔 나비』,
『그리움도 화석이 된다』, 『그대 이름 내 가슴에 숨쉴 때까지』
그리고 에세이 『내 잠 속에 비 내리는데』,『 말더듬이의 겨울수첩』,『감성사전』,
『그대에게 던지는 사랑의 그물』, 『날다 타조』, 『하악하악』 이 있고 그외
『감성사전』, 『흐린세상 건너기』, 『외뿔』, 『내가 너를 향해 흔들리는 순간』,『뼈』,
『글쓰기의 공중부양』, 『여자도 여자를 모른다』 등이 있다.
* 작가 이외수가 화려하게 조명받고 있다.
한국대학신문이 창간 20주년을 맞아 전국 대학생 200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좋아하는 문인 1위는 이외수였다. 문학동네뿐이 아니다.
이외수는 드라마(크크섬의 비밀)에 이어 라디오(이외수의 언중유쾌) 출연,
CF 촬영 등으로 정신없이 바쁘다. 산문집 『하악하악』은 판매 40만 부를 훌쩍 넘어섰다.
고정독자 수십만 명. 그는 스스로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은 독립군 스타일’이라고 말한다.
63세 깡마른 이 초로(初老)의 작가 매력은 도대체 무엇일까...
ㅡ 중앙 Sun Day 이외수 인터뷰 기사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