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6년은 영조 52년으로 조선왕조 500년에 가장 오래 왕위에 있었고
83세라는 가장 많은 나이로 장수한 영조가 승하한 해였습니다.
파란만장한 세월, 나이야 겨우 25세였으나 몇 차례의 죽음의 역경을
통과한 세손(世孫) 정조가 마침내 등극한 해이기도 합니다.
11세에 아버지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참으로 억울하게 죽어가던
것을 직접 목격하였고, 그 뒤 세손에 책봉되어 동궁으로서도 죽음의
위협을 떨굴 수 없이 불안하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끝내 보위에 올랐
으니 정조로서는 감격적인 해였습니다. 이제 어려운 시절에 온갖 기지
와 재능으로 세손을 보호하여 등극하기까지 가장 큰 공을 세운 홍국영
에게 권력의 이동이 이뤄졌음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이른바,'홍국영 세도’가 하늘을 찌르던 시기가 그 무렵이었습니다.
벼슬이 높아지기를 바라거나 출세를 원하는 사람은 홍국영에게 아부하
거나 뇌물을 바쳐야만 했던 시절, 한 예외적인 인물이 있었으니,
바로 다산 정약용의 장인이던 홍화보(洪和輔:1726-1791)라는 분이었습
니다. 진사시에 장원하고도 운이 없어 문과에 급제하지 못하자, 무과
에 응시하여 무인으로 크게 현달한 분입니다. 글을 너무 잘해서 무신
이면서도 문한이 넉넉한 사람만이 발탁되던 승지(承旨)라는 시종신
(侍從臣)에 여러 차례 임명되어 임금의 높은 칭찬을 받았습니다.
문무를 겸한 신하로서 여러 곳의 수령(守令)을 역임하였고 승지에 경
연참찬관도 지냈고 전라좌도수군절도사, 경상우도병마절도사, 함경북
도병마절도사, 황해병마절도사 등 무인으로 성공했습니다. 외동딸의
남편 다산에게도 한없는 애정을 보였던 분입니다. 몸은 작고 약하게
보였으나 굳센 마음의 대장부로 누구에게도 아부하거나 굽힌 적이 없
는 곧고 바른 인물이었습니다. 모두가 홍국영에게 뇌물을 바치고 철저
히 아부하던 시절에 그는 평소에 홍국영을 가볍게 여겼던 터라 한 번
도 뇌물을 바치거나 아부하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미움을 산 홍화보는 홍국영의 탄압으로 운산(雲山)으로 귀양
을 떠납니다. 그때 곁에 있던 누군가가 비록 귀양을 가더라도 후사를
위해 편지와 뇌물을 마련하여 홍국영에게 바치도록 권유했습니다.
그러자 홍화보는 비웃으며, “자네는 홍국영을 태산처럼 보는데 그는
빙산(곧 녹아버릴 얼음으로 권력은 짧다는 뜻)에 지나지 않네”라고
말하자 그 소리를 들은 모두가 혀를 내두르며 크게 놀라 홍화보를 위
태롭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고 합니다. 오래지 않아 홍국영은
패망하고 홍화보는 귀양지에서 돌아와 벼슬을 계속합니다.
하늘을 찌르는 권력에 두려움 없던 다산의 장인 홍화보, 얼마나 옳은
분입니까. 다산이 지은 장인 홍화보의 「묘갈명」에 나오는 이야기입
나다. (박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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