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空)의 의미.
공(空)의 의미
비유(非有)의 공(空)은 실무(實無)가 아니기 때문에 진공(眞空)이요,
비유(非有)의 유(有)는 실유(實有)가 아니기에 묘유(妙有)인 것이다.
그럼으로 진공이기 때문에 연기의 제법이 뚜렷하고,
묘유이기 때문에 인과의 만법이 일여(一如)하다.
불타의 가르침의 제일 핵심은 공(空)을 이해하는 데 있다.
공(空)이란 비어있음이다. 비어있다는 말은 차있다는 말의
상대어가 아니기 때문에 우리를 혼란스럽게 만든다. 그래서
옛 선지식들은 공(空)을 흔히 텅 빈 큰 그릇으로 비유하여 설명한다.
‘텅 비어 있다’는 말은 곧 공간을 의미하고 광대함을
의미하며 끝이 없음을 의미한다.
실(實)을 설하기가 어려워 쓰임으로 설한 것이다.
사람들은 모두 집에 살고 있다.
그런데 사람들이 생각하는 집이란 단지 공간을 둘러싸고 있는 벽이다.
그러나 집에 대한 선지식들의 개념은 벽안의 공간을 말한다. 벽이 아니다.
사람들이 살고 있는 것은 벽이 아닌 그 공간 안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그 공간이 진정한 집이다. 그러나 집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공간,
텅 빈 상태를 둘러싸고 있는 틀을 생각한다.
사람들이 단독주택과 아파트를 달리 보고,
왕궁과 오두막집을 다르게 보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깨달은 선지식들에게는 그 둘이 서로 다르게 보이지 않는다.
그 텅 빈 상태란 양자가 똑같기 때문이다.
그대가 벽을 본다면 오두막집은 오두막집이고 왕궁은 왕궁이 된다.
그러나 텅 빈 상태로 보면 둘은 같다. 그것이 곧 진정한 집이다.
왜냐하면 텅 빈 상태만이 그대를 수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대를 수용하는 것은 벽이 아니다. 공간이다.
그대가 그 안의 텅 빈 상태만을 본다면
그때 오두막집과 왕궁 사이의 분별이 사라진다.
텅 빈 상태는 언제 어디서나 항상 똑같다.
그러나 벽에는 부유한 벽이 있고 가난한 벽이 있는 것이다.
이것을 이해한다면 그대는 공(空)이란 말의 의미를 깨닫게 될 것이다.
이것은 무한한 가능성과 무한한 의문을 지닌 비유인 것이다.
사람을 볼 때 그대는 육체만을 본다.
그렇다면 그대는 벽을 보는 것이다.
그 육체는 진정한 사람이 아니다.
진정한 사람이란 그 안에 비어 있는 상태를 말한다.
육체는 아름다울 수도 있고 추할 수도 있다.
병들어 아플 수도 있고 건강할 수도 있다.
젊을 수도 있고 늙을 수도 있다. 곱추도 있고,
언챙이도 있고, 장님도 있다.
그러나 그 안의 텅 빈 상태는 항상 똑같다.
그대는 이 점을 깊이 깨달아야 한다.
다른 비유를 써서 생각해 보자.
그대가 시장에서 가서 질그릇이나 또는 금으로 된 그릇을 산다고 하자.
금으로 된 그릇은 질그릇과는 다르다. 그것들의 벽이 다른 것이다.
그러나 그 안의 텅 빈 상태는 똑같은 것이다.
가난한 사람과 부자가 샘으로 간다.
가난한 사람은 질그릇을 가지고 가며
부자는 금으로 된 그릇을 가지고 간다.
그들은 똑같이 텅 빈 공간을 가지고 가는 것이다.
그들은 같은 물을 길어 그릇을 채운다.
그러나 그 벽이 사용되는 것이 아니고
그 안의 텅 빈 공간이 사용되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도 조사나 선지식들도 모두가 이렇게 말한다.
“그대 안을 보라. 밖을 보지 말라”
안의 텅 빈 공간이 곧 그대의 존재이다.
그대의 존재는 안이 텅 빈 공간이다.
이는 그대의 존재가 곧 비존재라는 것을 의미한다.
존재라는 말이 그대 안에 어떤 것이 있다는 느낌을 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대 안에는 아무 것도 없다. 밖으로는
그 어떤 사람이지만 그대의 내면에는 텅 빈 상태만이 있는 것이다.
모든 에고는 표면에 있는 것에 불과하다. 안에는 에고가 없다.
누가 안에 있는가? 그대가 이 사실을 알게 되면 그대는 웃을 것이다.
그리고 그 질문이 부적당하다고 말할 것이다.
아무도 없다. 정확히 말해서 무(無)다.
그대가 무한한 존재인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경전이나 선지식들이 부처가 중생이요,
중생이 곧 부처라고 하는 그 말이 바로 이를 말하는 것이다.
그대 바깥의 어느 곳에서도 신을 발견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신은 전체의 텅 빈 상태이다. 그대는 신의 형체만을 찾아다니고 있다.
중동은 알라신을 찾아다니고, 서양은 예수를 찾아다니며,
인도인들은 쉬바와 브라흐만을 찾아다닌다.
모든 사람이 다 형체만을 찾아다니고 있는 것이다.
아무도, 그 아무도 텅 빈 상태를 찾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대는 어디를 가고 있는가?
공간은 그대 주위 어느 곳에서나 그대를 둘러싸고 있다.
이것이 바로 신이다. 공간이 바로 신인 것이다.
그대가 그 안에서 태어나고 그 안에서 살고 있으며
또 언젠가는 그곳에서 분해되어질 그 공간이 바로 신인 것이다.
불교는 단지 그것을 <공(空)>이란 말로 바꾼 것이다.
물고기는 바다에서 태어나고 바다에서 살다가
그 바다에서 죽어 없어져 버린다.
그 고기는 다름 아닌 바닷물일 뿐이다.
그대의 경우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텅 빈 상태는 그대 주위의 어느 곳에도 있다.
그리고 그와 똑같은 텅 빈 상태가 그대 안에도 있다.
텅 빈 상태가 어떻게 두 종류로 존재할 수 있겠는가?
불가능하다. 텅 빈 상태는 언제나 똑같다.
죄인에 있어서나 성자에 있어서나 텅 빈 공간은 똑같은 것이다.
죄인은 바깥에 죄인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고
성자는 바깥에 성자라는 이름을 붙이고 있을 뿐이다.
그대는 벽에 너무도 집착하고 있어 벽에는
아무 의미도 없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다.
왜 그대는 어떤 사람을 성인이라고 부르는가?
그는 그대가 선이라고 하는 그 무엇인가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왜 그대는 어떤 사람을 죄인이라고 부르는가?
그는 그대가 악이라고 하는 어떤 것을 그가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행동은 밖에 있는 것이다.
행동은 단지 벽에 발라진 페인트에 불과하다.
그러면 안의 텅 빈 공간은 어떠한가?
안의 텅 빈 공간이 그대의 행동에 의해서 더럽혀질 수 있는가?
그대는 텅 빈 공간을 더럽힐 수 있는가?
그대는 텅 빈 공간을 깨끗하게 만들 수 있는가?
‘
비어 있음’은 단지 비어 있는 것이다.
어떻게 그것을 더럽힐 수가 있고 또 깨끗이 할 수가 있겠는가?
비어 있는 공간은 건드려지지 않은 채 존재한다.
그대가 나를 칼로 자른다면 그대는 나의 육체를 자르는 것이지
나를 자르는 것이 아니다.
만일 내가 어떤 것을 한다면 나는 벽으로써 그 행위를 하는 것이다.
내면의 비어있는 상태는 행위자가 아니다.
공이란 없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진공이라고 한다.
공이란 있어도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묘유라 한다.
그래서 공을 일러 진공묘유라고 하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