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동족상잔) 아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날을 ,상기하자 6.25!!
오늘은 6.25전쟁이 발발한지 63년이 되는 날입니다.
전쟁의 참혹상을 몸소 겪어본 본인의 이야기를
이 글을 읽는 젊은 분들은 설마 그랬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겠지만
그러나 엄연한 사실이었음을 밝혀 두는 바입니다.
6.25전쟁이 발발시 본인의 나이는 만 6세였습니다.
우리 가족은 6.25사변이 날 때는 충북 단양군 영춘면의 작은 아버님 댁으로 피난을 갔었고
1.4후퇴때는 대구까지 피난을 갔었습니다.
피난길에서 폭격맞아 죽은 시체와 얼어죽은 갖난아이 시체도 보았습니다.
잠 잘곳이 없이 소 오양간에서 짚을 깔고 자기도 하였습니다.
이 땅에서 6.25와 같은 동족상잔(同族相殘)의 전쟁이 결코 다시 일어나서는 안됩니다.
아래의 글을 읽어 보시면 전쟁의 참혹상을 더 느낄 겁니다.
6.25 動亂 參戰 犧牲者
美國軍은
전사자 33,665명
비전투 희생자 3,275을 포함하여
총 36,940명의 젊은 목숨을 바쳤다.
또한 103,284건의 작전에서 92,134 명의 전상자를 냈으며
총 1,789,000명의 미군이 1950.6.25일부터
1953.7.27일까지 한국전쟁에 참전 했으며
아직도 8,176명의 실종자를 남기고 있다.
韓國軍은
전사자 415,004명을 포함하여
총 1,312,836 명의 희생자를 냈으며
U.N 軍은
전사자 3.094명을 포함 총 16,532명이 희생되었다.
1950. 6. 18. 6.25 전쟁 발발 일주일 전 의정부 북방 38 접경에서
미 국무장관 덜레스(가운데) 일행이
38선 너머 북쪽을 살피고 있다(덜레스 오른쪽 신성모 국방장관)
1950. 8. 18. 백선엽 장군(가운데)이
미군과 함께 작전을 세우고 있다.
남하하는 피난민 행열
1950. 8. 15. 창녕 남지철교. 국군의 최후 방어선으로 핏빛으로
강물이 물들 만큼 피아 엄청난 희생을 치렀던 격전의 현장이었다
1950. 8. 15. 이승만 대통령과 신성모 국방장관이
8.15 경축식을 끝낸 후
임시 국회의사당인 문화극장을 떠나고 있다.
1950.9. 15. 인천상륙작전을 함상에서 진두 지휘하는 맥아더 장군
1950.9.15 인천상륙작전
1950. 9. 15. 인천 월미도로 상륙하는 함정들
1950. 9. 16. 인천부두로 상륙하는 맥아더 장군
1950. 9. 23. 서울 탈환을 눈앞에 둔 노량진에서 바라본
끊어진 한강 철교
1950. 9. 25. 한강 도하 작전
1950. 9. 27. 경인가도에서 국군 수복을 환영하는
흰옷 입은 사람들이 태극기를 흔들고 있다
1950.9.28 중앙청에 태극기 계양하는 해병대용사들
1950. 9. 29. 태극기 펄럭이는 중앙청
이승만 대통령 내외와 맥아더장군
북한군에 의해 대량 학살된 시신 옆에서 오열하고 있는 한국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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